성 클리닉

운명 같은 이별, 보험 처리하고 싶다...

돌체비타67 2008. 12. 4. 00:50

그녀가 이별을 겪었다.

일은 손에 잡히지 않고 밥도 넘어가지 않았다.

핸드폰이 울리면 혹시나 그가 아닐까 싶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늘 다른 전화였다.

미처 그녀의 상태를 모르는 다른 사람들의 재잘거림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지금 이 상황이 영화라면 엔딩 스크롤이 올라가길 기다릴 텐데 엄연한 현실이었다.
 
어쨌든 삶은 계속되고 시간은 흘러간다.

가만히 있어도 살아진다.

그러니 살아야 한다.

넘어가지 않는 밥을 먹어야 하고 잡히지 않는 일을 해야 한다.

그래서 더 힘들다. 그게 이별이다.
 
하여, 이별이란 교통사고와 같다.

예측할 수 없고 상처도 크다.

당하고 나면 처리해야 할 일도 많다.

당사자끼리 문제가 아닌 제3자가 개입된 경우라면 문제는 더 커지기 마련이다.

 

사고 당시의 충격도 충격이지만 시간이 꽤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후유증처럼 나타나 다시 그날의 악몽이 떠오른다.

어디 가서 하소연하기에도 너무 늦었다.

이별의 강도가 클수록 아픔은 오래 간다.
 
이에 더하여 이별은 교통사고보다 더 끔찍하다.

교통사고는 대개 모르는 사람끼리 문제이기라도 하지,

이별이란 주변 인간 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 혹은 그녀로 인해서 알게 됐던 사람들을 송두리째 잃을 수도 있다.

애인과 함께 자주 가던 추억의 장소는, 설령 그곳을 아무리 좋아했을지라도 선뜻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아니, 생각조차 하기 싫을 때가 많다.

 

사고가 있는 모든 곳에는 보험이 있다.

보험이란 사건이 일어날 경우와 그렇지 않을 경우를 놓고 벌이는 도박이다.

사건은 대개 일어나지 않을 확률이 더 많다.

그래서 보험사들은 높은 확률에, 피보험자들은 낮은 확률에 돈을 건다.

살면서 교통사고를 겪을 확률은 그렇지 않을 확률보다 낮다.
 
그렇지만 만에 하나라도 일어나면 골치 아픈 게 사건과 사고다.

예측 불가능한 위험을 막기 위해 사고의 가능성 뒤에는 보험이 붙기 마련이다.

차는 물론이거니와 자전거에도 보험이 있다.

암에 걸릴 확률은 그렇지 않을 확률보다 높지만 그 낮은 확률을 위해 사람들은 보험에 든다.

유명 피아니스트는 자신의 손가락을, 가수는 성대를 위해 보험에 든다.

국보급 문화재는 제 아무리 철통 경비를 붙인다 한들 보험에 가입해야 만에 하나의 사태가 일어났을 때 안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별에는 보험이 없다. 이별로 인해 겪게 되는 각종 곤란함과 리스크를 생각해 본다면 의아한 일이다.

이별은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다.

한 사람의 이별이 조직에 주는 영향을 생각해 보라.

업무의 질은 떨어지기 마련이다.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는 학생이라면, 인생 전체가 달라질지도 모른다.

조직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지독한 이별을 겪었다면 조직 전체에 파장이 퍼진다.

군대에서 고참이 여친에게 차였을 때 중대 전체의 그 싸늘한 분위기를 상상해 보라.

만약 무슨 경제연구소에서 이별이 주는 사회적 손실을 연구해 본다면 꽤 높은 금액이 매겨지리라.
 
이별을 겪은 사람에게 주변에서 아무리 위로해 봤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말로 하는 위로란 그때뿐이다.

아무도 남의 마음에 본질적으로 다가설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고는 운명이다.

이별도 운명이다.

사고의 뒤에 따라다니는 보험이여, 이별에도 함께하라.

운명의 희생자들에게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기회와 여견을 보험으로 제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