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지혜

그림보는법

돌체비타67 2007. 2. 1. 00:01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한편의 그림을 제대로 읽어내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림이란 것이 다보여주는 듯해도 숨겨놓은 것이 너무 많은 탓이다.

그 그림을 그린 화가가 살던 시대의 교양이나 상징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한폭의 그림이 말하고자하는 바를 제대로 들을 수없다는 뜻이다.

그러다보니 옛그림은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같은 시대를 사는 화가의 그림도 잘 모르겠는데, 몇 백년전에 그려진 그림을 감상하며

무언가를 느낀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기에는 짐작할만한 몇가지 이유가 있을 법하다.  

동양화의 일반적인 특징에 대해 공부한 것이 없거나, 한자독해능력이 떨어지는 경우에

옛그림을 이해하기란 결코 녹록치 않은 법이다. 누군가 말한 것처럼,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그런데 조정육이 쓴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아트북스)는 이런 일반적인 생각에 반기를

든 책이다.  이 책은 옛그림을 이해하는 방편으로 개인적 체험을 표나게 강조하고 있다.

한편의 그림을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교양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나,

어떤 그림을 한 개인의 체험과 관련해 보면, 그 의미가 새롭다는 것을 실증하고 있는 것이다.

백마디 말을 하기보다 하나의 적절한 예를 들면, 이 말을 쉽게 이해하게 되리라.

<화려한 모란을 보는 슬픔>이라는 글은 어머니가 치매에 걸렸다는 사실을 통보받는 전화로 시작한다.

이 전언은 이제 어머니가 숱한 기억과 이별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여자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살아오며 자신의 뇌에 새겨놓았던 추억의 화석들이 일시에

사라져 버렸다니, 안타깝기 그지 없었다.

글쓴이에게 어머니는 각별히 꽃과 인연이 깊은 것으로 기억된다.

봄이 되어 꽃을 심는 딸을 보며 자신을 닮아 꽃을 좋아한다고 자랑스러워했다.

작년에는 모란옆에 수국을 심었다. 일찍 지는 모란이 준 공허감을 달래는데는 수국이 제격이어서다.

겨울이 되자 어머니는 수국이 얼어죽을까 염려돼 낙엽과 풀을 덮어주었다.

그 덕에 올 여름에도 수국이 활짝 피었으나, 정작 어머니는 그 자리에 없다.

심란해진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그림책을 보다 모란을 발견했을 때 순간적으로 치솟아오른,

울컥하는 감정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그토록 좋아했던 모란꽃에 대한 기억을 더 이상 품고 있지 못할 어머니를 떠올리니

가슴이 아파온 것이다.

책 전체가 이런 식으로 씌어져 있어 다른 예도 얼마든지 들 수 있다.

김홍도의 <점괘>는 자칭 도사에게 들은 언짢은 말과 겹쳐지며 그 의미가 새롭게 돋을새김된다.

어느날 천도인이라는 사람에게 한마디 들었다.

스님될 팔자인데 결혼을 해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해결책은 당장 천도재를 드리는 것. 평소같으면 귀에 들어올 리 없지만,

어머니가 치매증세로 집을 나간 다음날이라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불안감이 스멀거리며 고개를 처들어올리는데, 김홍도의 그림을 보면 옛사람들도 그랬던 것 같다.

<점괘>라는 그림을 볼라치면, 승려 두사람이 땅바닥에 부적을 펴놓고 시주를 기다리고 있다.

보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아낙네의 손이 닿은 곳이다.

쓰개치마를 잡고 있었을 손이 주머니에 가있지 않은가.

이쯤에서 글쓴이의 속내가 드러나지 않을 수 없다.

“그림속의 아낙이 들었던 점괘는 무엇이었을까. 얼굴이 환한 걸보면

나처럼 심한 얘기를 듣지 않는 듯하다”라고 말이다.

김홍도의 그림은 또 나온다. 이번에는 <주막>이라는 그림.

20년 전에 경남 거창에 마애불을 보러 갔을 때의 일이다.

먼길을 달려온지라 허기져 있었는데, 마침 허름한 구멍가게 하나를 발견했다.

음료수와 빵으로 허기를 급하게 달래고 파전을 먹었다.

워낙 배가 고팠던지라, 뜨거운 파전을 허겁지겁 먹는데,

가게 주인의 아이가 심하게 보채는 소리를 들었다.

가게에 들어올 적에 아이를 본 듯한데,

먹느라 정신이 없어 아이의 징징거리는 소리를 미처 듣지 못했던 것이다.

아이가 얼마나 주전부리를 먹고 싶으면 저럴까 싶어 파전을 남기고 가게를 나왔다.

김홍도의 <주막>에 바로 그런 모습이 그려져 있다.  

김홍도의 예리한 눈이 주모의 치막자락을 당기며 칭얼거리는 아이를 포착한 것이다.

아마도 냄새만 요란하게 맡은 아이가 국밥을 먹고 싶어 어미에게 조르는 모양이다.

글쓴이는 이 그림을 설명하면서 자기의 체험이 녹아있는 질문을 하나 던진다.

“손님들은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었을까.” 스스로 말하기를, 자신처럼 아마 듣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감동을 받은 글은 <매화꽃 지던 날>이다.

글쓴이가 대학교 1학년때 겪은 일이다. 봄이었다. 비온 다음날 학교에 가니

매화꽃이 눈처럼 쌓여있었다. 그 장면이 장승업의 홍백매 병풍을 떠오르게 했다.

10폭 병풍을 매화꽃으로 가득 채워놓고 고목의 가운데 부분만 그려넣은 것은,

오로지 그것만이 분분히 날리는 매화꽃에 사로잡힌 화가가 자신의 도취된 감정을 드러낼 가장

적절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리라.

그 날 도서관에  한 여인이 들어오더니, 큰 목소리로 시를 읊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로 시작한 그 여인은

“분분한 낙화....결별이 이룩한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라며 한편의 시를 암송했다.

누군가가 그녀를 이끌고 밖으로 나갔지만, 글쓴이는 매화꽃을 보면 항상 그녀가 떠오른다고 했다.

이 글을 읽으며 마치 예리한 면도날로 턱을 베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은,  

이 일이 81년 광주의 한 대학에서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림이었던 시였던, 한편의 예술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겹눈이 필요하다.

그 하나는 교양의 눈이다. 많은 것을 알지 않고서는 제대로 볼 수 없다.

책을 읽으며 다른 사람의 지식을 내 것으로 만드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하나의 눈은 읽거나 보는이가 갖고 있는 삶에 대한 통찰력이다.

그것이 무엇이었든 삶의 문맥속에서 작품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동안 이 눈은 너무 무시되어 왔다.

그러다보니 그림이든 시든 어렵다고만 느껴졌고, 건조한 학문적 대상으로만 여겼으며,

특별한 사람들만이 감상하는것인양 생각해 온 것인지 모른다.

앞에서 나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인용했다.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는 그것말고 또 하나 있다고 조용히 귀띔해준다.

살아온 만큼 보이는 법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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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보는 법을 묻는 사람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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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 영혼이 덧칠된 작품일 것이다.
이대흠 기자



이따금 받는 질문 중에 하나가 '그림을 어떻게 봐야 하느냐?'는 것이다.
밑도 끝도 없이 이렇게 질문을 던진 사람들 대개는 자신도 계면쩍은지 빙그레 웃기 마련이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면 나는 여러 말하지 않는다.
'기냥 봐.' '보기야 보지만...' 머뭇거리는 상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림을 보는 방법은 따로 없다. '기림은 기냥 보면 되는 것'이다.


마티스의 댄스


오래도록 화첩을 뒤적거려 보긴 하였지만, 내가 그림에 대해 아는 것은 별로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림을 볼 때에 아무 생각 없이 본다는 것은 아니다.
흔히 사람들이 그림에 대해 말을 할 때 어떤 작품을 가리켜 좋다고 하는 경우가 있다.
그림에 대해 상당히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가 그러한데,
그 사람들이 좋다고 말한 그림을 보면서 나는 대부분의 작품에 동의를 하지 않는다.
그런 그림들은 대개 '느낌'만 좋은 그림이기 일쑤이다.

느낌만 좋은 그림은 많이 있다.
그런 그림들의 한가지 특징은 사람들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람이 등장하더라도 막연한 이미지로만 등장한다.
사람들은 대개 밝고 환하게 그린 꽃과 나무를 좋아한다.
물론 화가의 솜씨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배꽃이나 동백꽃을 잘 그려 놓은 그림은 방이나 거실에 놓아두기 좋은 그림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작품들의 대부분은 실패작들이다.
일정 솜씨를 지닌 화가가 센티멘털리즘에 의지해서 팔아볼 목적으로 그린 그림들.
사실 그것들이 잘 팔리는 것도 사실이다.


쿠르베의 밀렵꾼



물론 개중에 뛰어난 작품이 있기는 있다.
문제는 옥석을 가릴 수 있느냐는 데 있다.
한가지 기준을 먼저 제시한다면, 어떤 그림을 볼 때, 이 작품이 예술 작품인가 아닌가에 대해서 고민을 하라.
화가들은 많지만 예술가들은 많지 않다.
예술 정신을 떠난 화가는 화가라기보다는 화상에 가깝다.
그런 화상들의 작품은 백년이 지나도 가치를 인정받기는 힘들다.


글도 마찬가지이지만, 일단 그림은 잘 그려진 것이라야 한다.
화가라는 이름을 걸고 그린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다.
하지만 잘 그려졌다고 해서 그 작품을 잘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다음이 더 중요한데,
예술가의 영혼이 깃 든 작품이냐를 따져 보아야 한다.
이름만 지우면 누가 그렸는지 구별할 수도 없는 작품은, 말 그대로 개성이 없는 것이고, 보기에 예쁜 그림은 보기에 예쁜 그림일 뿐이다.

한 화가가 뜨거운 예술혼을 가지고 그린 작품엔 그의 끓는 영혼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것은 물감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
영혼이 덧칠된 작품일 것이다.
그림에 대해서 말을 할 때에는 누가 뭐라고 말하더라는 점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좋다.
그냥 그림을 직접 대하고 거기에서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면, 그 작품은 당신 눈에는 좋은 작품일 것이다.
하지만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어설픈 눈으로 어떤 작품을 평가하는 것은 좋지 못하다.


피카소의 앉은 나부

어렵게 말하지 말자.
어떤 화가의 작품을 볼 때, 자신이 좋아하는 대가들이 이 작품을 그렸다면? 하는 상상을 해 보라.
느껴지는 것들이 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나 피카소, 혹은 고흐나 콜비츠의 그림 만한 작품들이 지금 이 땅의 누군가에 의해 그려지고 있을지도 모른다.